경영

그는 항상 가장 어려울때 새 사업을 시작했다 - 이병철 삼성 창업주

즐거운 츄리닝 2010. 1. 18. 13:22

그는 항상 가장 어려울때 새 사업을 시작했다
事業報國 돈벌기보다 국민경제를 살찌우는데 주력
情報技術 정보가 기업의 생명ㆍ매출 10% R&D 투자
人材第一 의심가면 쓰지말고 한번 쓴 사람 의심말라
◆ 경영의 神들에게 배우는 기업가 정신 ◆ ① 이병철 삼성 창업주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선대 회장은 조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1910년 태어났다. 다음달 12일이 탄생 100년이다. 이 선대 회장은 단순 무역업에 한계를 느끼고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공장을 설립해 수입대체 산업 선봉에 섰다. 조국 산업화에 정열을 쏟은 것이다. 그는 기업가로 활동한 50여 년간 소비재 중화학 전자 금융 의료 유통 통신 반도체 등으로 사업영역을 계속 넓혔다. 한 업종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미개척지를 찾아나섰다. 이 선대 회장은 이 땅에 기업다운 기업을 처음으로 만들고 키운 산업화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인생 자체가 한국 근대사이자 발전사인 셈이다. 무한탐구와 무한정진의 삶을 살다간 그는 21세기 경영교과서가 됐다.

2008년 가을 미국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빚어진 세계 금융위기 불똥은 실물경기로 번졌다. 세계 경제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위기 상황에서 삼성이 택한 것은 시나리오 경영.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세우지 않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삼성은 전 분야에서 원가 경쟁력을 높였다. 불필요한 낭비 요인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인 것이다.

이러한 삼성 경영방침은 이병철 선대 회장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이 선대 회장은 평소에 "호황일 때 불황을, 불황일 때 호황을 준비하라"며 "불경기에도 돌파구는 있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어려운 시기에 기업의 참다운 실력이 드러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 선대 회장 유산은 결국 빛을 발했다. 지난해 불황 속에서도 삼성전자 매출은 사상 최대인 136조원을 기록했다.

◆ 창조경영을 실천한 CEO

= 1987년 타계한 이 선대 회장 경영이 20년이 지난 요즘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의 경영은 도전과 모험의 역사다. 이 선대 회장을 거론할 때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가 빈번히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한창수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이 선대 회장은 무에서 유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요즘 창조경영과 맥이 닿아 있다"며 "과거의 것을 개선하거나 혁신 차원을 뛰어넘었다"고 평가했다.

1938년 삼성상회 창업 이후 이 선대 회장은 1950년대부터 1~2년에 한 개씩 새로운 기업을 세웠다. 70대에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반도체 창업을 총지휘했다. 그는 평소에 `보보시도량(步步是道場)`이라는 말을 즐겨 썼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인생이라는 생각 아래 끊임없이 사업을 일으킨 것이다.

안철수 KAIST 석좌교수는 "당시에는 기업가 정신을 창업정신 또는 개척정신으로 볼 수 있다"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벤처정신이 진정하게 발휘됐던 시절"이라고 설명했다.

◆ 미래를 내다본 경영

= 이 선대 회장 경영은 10년 이상, 50년을 미리 내다봤다. 1982년 미국 보스턴대학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장에서 소렌슨 당시 총장은 "이 회장이 새로운 사업을 일으킨 것은 항상 그 사업의 시장성이 가장 낮은 수준에 있을 때였고 극히 혼란한 환경에 처해 있을 때였다"며 이 선대 회장의 남다른 선견지명을 높이 평가했다.

한국전쟁 상흔이 가시지 않은 1953년과 1954년에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연이어 창업한 것도 이 선대 회장이 시장을 미리 내다봤기 때문이다. 남들이 무모하다며 말리는 사업이었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60년대 말 이 선대 회장이 전자업계에 뛰어들었을 때 그는 경기도 수원에 공장용지로 땅 45만평을 확보했다. 걸음마 단계인 회사에 45만평은 너무 넓은 땅이어서 주위에서는 부동산 투기를 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자 45만평 용지는 비좁아서 부천에 다시 공장용지를 확보해야만 했다.

◆ 정보와 기술을 중시한 경영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한옥 자택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 만년의 이병철 회장. 용인 한옥은 이 회장이 새로운 사업을 구상할 때 즐겨찾던 곳이다. <사진제공=삼성>
= 이 선대 회장의 `도쿄 구상`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60년부터 해마다 연말연초에 도쿄를 찾은 것이다. 여기서 그가 한 것은 정보 수집이었다. 도쿄에서 매스컴과 지인들을 만나 변화하는 세계를 읽고 정보를 얻으며 새로운 사업을 구상한 것이다. 전자와 반도체, 항공산업 진출 등은 모두 도쿄 구상이 낳은 산물이었다.

박오수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최신 정보가 기업의 생명이라는 것을 이 선대 회장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라며 "그는 한국보다 정보가 빠른 일본에서 최신 트렌드를 접한 뒤 이를 경영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평가했다.

1986년 6월 27일, 이 선대 회장은 초여름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경기도 용인에서 야심차게 추진한 삼성종합기술원을 짓는 첫 삽을 떴다. 이곳에서 이 선대 회장은 "기술은 국력이며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기술 중시 경영을 강조하며 매출 10%까지 연구개발(R&D)을 위해 쓰라고 했다. 또 삼성 CEO는 모두 최고기술책임자(CTO)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전후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난 이공계 우수 인재가 삼성에서 빛을 발한 것은 이 선대 회장의 기술인 우대 정책 때문이었다.

◆ 돈보다 인재를 강조한 경영

= 이 선대 회장 경영 이념은 사업보국(事業報國)과 인재제일(人材第一), 합리추구(合理追求)로 요약된다. 이 가운데 이 선대 회장이 늘 강조했던 것이 사람이다. 물건은 줄 수 있어도 사람은 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생전에 서류 결재를 하지 않았다. 내용을 보지 않고는 결재할 수 없는 서류밖에 못 만드는 직원이라면 처음부터 쓰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의심이 가는 사람은 쓰지 말고, 한 번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疑人勿用 用人勿疑)`가 그의 경영철학이었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본부장은 "사람을 믿지만 `신상필벌(信賞必罰)`을 확실하게 함으로써 합리성을 추구했다"고 분석했다. 이 선대 회장 인재경영은 오늘날 `삼성맨`이라는 신인류로 이어졌다. 인재에 대한 투자를 통해 삼성만의 차별된 DNA를 가진 도전적 인재를 창조한 것이다.

■ 이윤 일부 사회 환원해야… 삼성문화재단 세워 재산 3분의1 기증

고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 회장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회문화사업이다. 이 선대 회장은 평소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왔다. 기업의 이해집단인 고객 종업원 주주 정부 등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 같은 사회적 책임 일환으로 그는 육영 학술 문화 장학 등 사업을 추진했다.

이 선대 회장이 가장 즐겨 썼던 구절 가운데 하나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다. 이윤 추구를 기본 생리로 하는 기업가이면서도 그는 언제나 한 개인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선대 회장은 미국 강철왕 카네기의 `잉여재산이란 신성한 위탁물`이라는 말을 신조처럼 삼았다. 주인기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병철 회장은 나라가 없으면 삼성이 살아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늘 강조했다"며 "기업 이윤을 사회에 귀속시키는 것이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 선대 회장은 삼성문화재단을 통해 사회문화사업을 펼쳤다. 1965년 55세 생일을 맞아 제일모직과 제일제당(현 CJ)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신세계 등 개인 주식 10억원과 부산시 용호동 임야 10만여 평을 출연한 것이다. 당시로서는 기업가의 사회공헌사업이 낯선 시절이었다.

6년 후인 1971년에 이 선대 회장은 문화재단에 추가로 출연했다. 당시 이 선대 회장 재산은 180억원으로 평가받았다. 이것을 3등분해서 60억원을 문화재단 사업자금으로 넣은 것이다. 4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삼성문화재단은 현재 삼성미술관 리움과 호암미술관, 삼성어린이박물관 등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문화문고 발간도 삼성문화재단 주요 업적 가운데 하나다. 1971년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번역서를 시작으로 1979년까지 130종, 총 695만2000부를 발간하는 기록을 세웠다. 삼성문화문고는 도덕성과 관련된 동서고금 양서를 두루 선정해 시리즈로 발간했다. 전국 고등학교와 대학, 공공도서관에 무료로 기증하고 일반인에게는 염가로 판매했다.

이 선대 회장은 30대 때부터 미술품들을 수집했다. 초기에는 우리 문화에 대한 애착으로 시작한 그의 미술품 수집은 나중에 우리 문화를 지켜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발전했다. 그는 개인 소장품 1167점을 문화재단에 기증해 1982년 호암미술관 개관으로 이어지도록 했다. 그가 기증한 미술품 중에는 `국보 중 국보급 명품`으로 꼽히는 국보 133호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靑磁辰砂蓮華文瓢形注子)`를 포함해 국보 7점과 보물 4점이 포함돼 있다.

`이병철 경영대전`을 지은 홍하상 작가는 "국민이 호암(湖巖ㆍ이병철 회장 호)을 아는 것도 호암미술관 등 이병철 회장 사회문화사업이 꽃을 피웠기 때문"이라며 "국내에 처음으로 메세나라는 것을 실천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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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 100년 신드롬
◆ 경영의 神들에게 배우는 기업가 정신 ◆ ① 이병철 삼성 창업주

올해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 회장의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호암 경영`을 되짚어보는 열풍이 일고 있다. 이병철 회장은 1910년 2월 12일 경남 의령에서 출생해 1987년 11월 19일 타계했다. 호암은 그의 호(號)다.

삼성그룹은 다음달 10일 `한국의 경제성장과 기업가정신`을 주제로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 국제 학술대회를 연다. 삼성경제연구소와 한국경영학회,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공동으로 주최한다.

남상구 한국경영학회장(고려대 교수)이 주제 발표를 하고 최우석 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타룬 칸나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 장진호 연세대 교수, 야나기마치 이사오 게이오대 교수 등이 토론자로 참석한다.

삼성그룹은 호암기념관(가칭) 건립도 검토하고 있으며 기념식과 서적 발간, 영상물 제작 등 다양한 기념사업도 할 예정이다.

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삼성상회가 있었던 대구에서도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을 맞아 별도의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대구지역 경제계와 학계가 중심이 된 `호암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는 이 회장의 동상을 만들고 `대구오페라하우스`를 그의 호를 따 `호암오페라하우스`로 바꿀 계획이다. 또 오페라하우스 앞 도로 이름은 `제일모직로`에서 `호암로`로 변경된다.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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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의 5대 결단이 오늘의 삼성을 일군 힘
◆ 경영의 神들에게 배우는 기업가 정신 ◆ ① 이병철 삼성 창업주

1934년 10월 어느 날 청년 이병철은 밤늦게까지 놀다가 집으로 돌아와 자녀들이 곤히 잠든 모습을 봤다. 문득 `세월을 너무 헛되게 보냈다`는 생각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날 밤 뜬눈으로 지새면서 독립운동과 관료, 사업 가운데 어느 쪽으로 진로를 정할까 고민하다 결국 사업에 투신하기로 마음먹었다. 독립운동 못지않게 국민을 잘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며칠 후 부친께 이 결심을 얘기했더니 "스스로 납득이 가는 일이라면 결단을 내려보는 것도 좋다"고 승낙했다. 시장조사 끝에 정미소를 시작하기로 하고, 1936년 지인 2명과 함께 1만원(圓)씩 출자해 공동으로 마산에 `협동정미소`를 설립했다. 그 후 마산에는 상품을 운송할 수단이 크게 부족하다는 점에 착안해 `마산일출자동차회사`를 인수해 트럭만 20대를 보유한 자산가가 됐다. 하지만 그는 대규모 토지 매입 사업에서 큰 실패를 봤다. 절치부심 끝에 1938년 대구에 `삼성상회`를 설립하고 무역업으로 업종을 전환했다. 삼성상회는 현재 삼성그룹 모태가 됐다.

◆ 상업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

=이병철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수입품을 들여다 파는 무역업이 외화 낭비라는 것을 깨달았다. 수입품을 대체할 제조업에 뛰어들겠다는 뜻을 밝히자 주위에서는 `전쟁통에 무슨 공장 설립이냐. 수입해서 파는 편이 안전하고 이익이 더 난다`며 말렸다. 그렇지만 이병철은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1953년 순수 한국인 손으로 공장을 지어 설탕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CJ 전신인 제일제당을 설립한 것이다. 이병철은 자서전에서 그때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다.

"황무지에 공장이 들어서고 수많은 종업원들이 활기차게 일에 몰두한다. 기업가에게는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는 소중한 순간이다."

당시 사람들은 제일제당으로 돈을 많이 번 이병철을 `돈병철`로 불렀지만 그에게 투자 동기가 됐던 것은 돈이 아니라 성취감와 국가경제에 기여한다는 사명감이었다.

그는 제일제당을 통해 수입대체 산업이라는 장르를 열었다. 무역업을 하던 상업자본가에서 산업자본가로 변신한 것이다. 이어 1954년에는 당시 수입의존도 80%인 모직을 국산화하기 위해 대구에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공장을 자력으로 짓겠다고 하자 미국 유명 모직기계 업체인 파이팅 임원은 새가 날개를 퍼덕이는 시늉을 하며 "한국인이 자력으로 건립한 공장에서 3년 이내에 제대로 된 제품이 생산된다면 하늘을 날겠다"고 비아냥거렸다.

`다윗`에 비견된 제일모직은 400년 전통을 지닌 `골리앗` 영국 모직업체들을 보란 듯이 물리쳤다. 그는 실패해도 계속 도전하는 불굴의 헝그리 정신으로 삼성 사업영역을 하나 둘씩 넓혀 나갔다.

◆ 중화학공업ㆍ첨단산업 개척

="삼성 업종 구성을 개편하라."

1972년 말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비서실에 중화학공업 비중을 높이라는 특명을 내렸다. 비서실은 1972년 삼성그룹 전체 수출액에서 15.7%에 불과한 중화학 부문 비중을 1977년까지 37.4%로 높인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1974년 삼성석유화학과 삼성중공업이 세워졌으며, 그 뒤 삼성조선과 삼성정밀 등이 차례로 설립됐다. 일본 산요전기에서 기술을 들여온 삼성전자는 1977년부터 일본 측 지분을 모두 넘겨 받아 독자적인 브랜드를 내걸고 글로벌시장 개척에 나서게 된다.

"대용량 메모리 반도체인 VLSI(초대규모 집적회로) 사업에 투자한다."

이병철 회장은 1983년 2월 도쿄에서 대규모 반도체에 투자하기로 결심하고 당시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대용량 메모리 반도체 사업 진출을 3월 15일을 기해 공표해 달라"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도박`이라며 말렸으나 그의 기업가 정신을 꺾지 못했다. 1987년 11월 세상을 뜨기 전 그가 참석한 마지막 공식행사도 그해 8월에 있은 경기도 기흥 반도체 3라인 착공식이었다.

◆ 탁월한 CEO인 3남 발탁

="창업보다 수성(守成)."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에서 "사업을 일으키는 것은 쉽지 않지만 이미 이룩해 놓은 사업을 지켜 간다는 것은 그 이상 어렵다"고 적고 있다. 오랜 고민 끝에 이 회장은 승계자로 3남인 이건희를 택했다. 어릴 적부터 유교 교육을 받아 `논어`를 바이블처럼 여긴 그가 장남이 아닌 3남을 후계자로 택한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의 결정이 탁월했다는 건 수치가 증명해준다. 1987년 이병철 회장이 작고하고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취임할 당시 삼성그룹 매출은 17조3900억원, 순이익은 2060억원이었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 취임 21년째인 2008년 매출은 11배 늘어난 191조1000억원, 순이익은 43배 늘어난 11조7000억원을 기록했다.

◆ 이병철 어록

▶개인이 사용 가능한 범위를 넘으면 이미 부는 내 것이 아니라고 느껴진다. (1971. 2. 사장단회의에서)

▶나는 기업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왔고 나의 갈 길이 사업보국(事業報國)에 있다는 신념에도 흔들림이 없다. (1976. 11. 전경련회보)

▶모든 설비 투자 계획에 있어서 10년 이상 50년 정도 장기 안목 위에서 세워야 한다. (1977. 6. 삼성조선 건설현장에서)

▶`삼성은 인재의 보고`라는 말을 세간에서 자주 하는데 나에게 있어서 이 이상 즐거운 일은 없다.

(1982. 4. 보스턴대학 명예박사학위 수여식 기념강연에서)

▶호황 때는 불황 때를 대비하고, 불황 때는 호황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1983. 9. 사장단회의에서)

▶기술은 국력이며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1986. 6. 삼성종합기술원 기공식에서)

▶인간사회 최고의 미덕은 봉사라고 생각한다. (1987. 1. 매일경제신문 기고문에서)

[김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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