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DNA` 역발상으로 위기 돌파 | |||||||||||||||||||
여의도 48배 서산간척ㆍ12월에 푸른잔디… | |||||||||||||||||||
◆ 경영의 神들에게 배우는 기업가 정신 / ② 정주영 현대 창업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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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회장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은 경영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론과 머리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해요. 참기업가 정신은 머리가 아니라 거트(gutㆍ용기)로 하는 겁니다. 정 회장님은 그런 점에서 거트를 타고난 분입니다." 1977년 10월 경영학의 구루 피터 드러커가 정주영을 찾아왔다. 정주영의 성공담을 잘 알고 있는 그는 만나자마자 `정주영식 경영`에 대해 진단을 내렸다. 드러커는 합리주의와 이성의 힘만으로 경영의 세계에 닥쳐올 불확실성과 위험요소를 껴안고 갈 수 없다고 설파했다. "드러커 교수님, 아예 우리 둘이 합치면 어떻겠습니까? 교수님의 머리와 저의 거트가 만난다면 세계적인 기업이 탄생하지 않을까요?"(웃음) 복잡한 이론도 단순하게 정리해 내는 정주영의 성공DNA는 드러커와의 만남에서도 빛을 발했다. 피터 드러커의 말처럼 정주영은 타고난 기업가로 통한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아버지의 소 판 돈을 들고 가출을 감행했던 이 소년의 인생은 불확실성과 위험에 대응하는 기업가 정신의 표본으로 자리잡았다. ◆ 불굴의 기업가 정신 = 정주영의 인생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을 교과서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경험한 실패는 곧이어 나타날 성공의 주춧돌이 됐다. 그의 이 같은 경험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기업가 정신을 형성하는 자양분이 됐다. 정주영은 휴전 직후인 1953년 아무 기술과 경험 없이 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에 뛰어들었다. 장비, 기술 부족은 물론 홍수까지 겹쳐 몇 배의 공사비를 들여도 완공이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주위에서 모두 포기하라고 했지만 형제들 돈까지 모두 끌어들여 결국 공사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때 얻은 신용으로 정주영은 당시 전후 최대 공사라는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수주해 현대건설의 기반을 구축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65년 사상 첫 해외 사업이었던 태국 고속도로 건설에서도 그는 참담한 실패를 맛봤다. 현지의 엄청난 강우량과 악천후, 불리한 토질을 고려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언어와 풍습이 다른 현지 인력관리도 엄청난 문제를 야기했다. 그동안 국내 건설 사업에서 번 돈을 다 털어넣다시피 해 겨우 공사를 완료했다. 그러나 태국 고속도로 건설 경험은 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주역으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후 1972년 정주영은 울산 미포만 사진 한 장만 손에 든 채 그리스 거물 해운업자 리바노스를 만나 26만t짜리 배 2척을 주문받았고 조선소 건립과 동시에 2척의 배를 진수시킨 세계 조선사에 유일한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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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월한 창의성
= 정주영의 이 같은 성공 모델을 두고 `개발독재시대 모델`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그러나 현대그룹 발전의 길목에서 정주영이 내놓은 아이디어는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단순한 추진력과는 확연히 대비된다. 서산 간척사업은 정주영의 창의성을 보여주는 백미다. 농부의 아들 정주영은 1980년대 초 바다를 메워 옥토를 만드는 대규모 간척사업에 착수했다. 여의도 48배 면적의 바다를 메워 농토로 전환하는 프로젝트는 한국의 서해안 지도를 바꾸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서산 앞바다는 조수 간만의 차가 너무 커 20만t 이상의 돌을 구입해 매립해야만 물막이가 가능한 곳이었다. 이때 정주영은 폐유조선을 침하시켜 유속을 감속시키고 토사를 투하해 둑을 완성하는 `정주영 공법`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공사기간을 9개월로 단축하고 공사비도 280억원이나 절감했다. 유엔군 묘지를 보리밭 물결로 만든 일화도 유명하다. 1952년 12월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이 부산 유엔군 묘지를 방문한 뒤 "묘지를 푸른 잔디로 꾸며달라"고 요구했다. 12월에 잔디를 구할 길이 없었던 정주영은 "풀만 파랗게 나 있으면 되느냐"고 반문한 뒤, 보리밭에서 새파랗게 자라는 보리를 수십 트럭 옮겨 심어 묘지를 녹색바다로 만들었다. 이후 미군 공사는 현대건설의 독무대가 됐다는 후문이다. 숭실대에서 `정주영 창업론`을 강의하고 있는 정대용 벤처중소기업학과 교수는 "제한된 자원을 선택과 집중을 통해 적절히 배치하고 복잡한 문제를 직관을 통해 단순화할 수 있는 능력은 창의성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면서 "불확실성 아래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정주영의 창의적 능력은 21세기에도 적합한 것"이라고 말했다. ◆ 경영 민족주의 = "현대는 단순히 장사를 하는 단체가 아니라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분투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집단이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하는데 현대그룹의 과거 50년 동안의 성장은 우리 현대 자신을 위해서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경제를 일으키는 데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생각한다." 현대건설 창립 50주년이었던 1997년 정주영이 밝힌 경영관은 사업보국(事業報國), 식산흥업(殖産興業), 사회공헌(社會貢獻)의 정신과 맥이 닿아있다. 박태일 현대경제연구원 컨설팅본부장은 "정주영의 경영민족주의는 그 스스로 일개 경영자의 범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한국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정주영은 소비재보다 사회간접자본(SOC)과 중화학공업에 치중했다. 국가의 초석을 세우기 위해 서비스, 소비재보다는 국가의 기간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주영은 독자 기술 개발을 고집해 선진국에 대한 기술 종속성을 줄이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1967년 미국 포드사로부터 자동차 조립기지화 제안을 받았던 정주영은 이를 거절하고 포니와 같은 독자 모델을 개발해 수출했다. 현대중공업도 일본의 미쓰비시로부터 선박 건조를 5만t급 이하로 제한하는 조건으로 기술 이전 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세계 시장을 뛰어다니며 스스로의 힘으로 대형 선박을 건조하여 수출했다. [박승철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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