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정주영 DNA` 역발상으로 위기 돌파

즐거운 츄리닝 2010. 1. 18. 13:18

`정주영 DNA` 역발상으로 위기 돌파
여의도 48배 서산간척ㆍ12월에 푸른잔디…
◆ 경영의 神들에게 배우는 기업가 정신 / ② 정주영 현대 창업주 ◆

부지런함을 최고 덕목으로 여겼던 고 정주영 창업주는 어둠이 깔린 새벽에 아들들을 청운동 자택으로 소집해 구 중앙청의 담을 끼고 현대 계동사옥까지 걸어서 출근하길 즐겼다. 1980년대 초 고 정주영 창업주를 선두(왼쪽 셋째)로 정몽구 현대ㆍ기아차 그룹 회장(왼쪽 첫째),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왼쪽 둘째), 정몽근 현대백화점 명예회장(오른쪽 둘째),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오른쪽 첫째)이 광화문 앞을 지나고 있다. <사진 제공=현대>
"정주영 회장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은 경영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론과 머리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해요. 참기업가 정신은 머리가 아니라 거트(gutㆍ용기)로 하는 겁니다. 정 회장님은 그런 점에서 거트를 타고난 분입니다."

1977년 10월 경영학의 구루 피터 드러커가 정주영을 찾아왔다. 정주영의 성공담을 잘 알고 있는 그는 만나자마자 `정주영식 경영`에 대해 진단을 내렸다. 드러커는 합리주의와 이성의 힘만으로 경영의 세계에 닥쳐올 불확실성과 위험요소를 껴안고 갈 수 없다고 설파했다.

"드러커 교수님, 아예 우리 둘이 합치면 어떻겠습니까? 교수님의 머리와 저의 거트가 만난다면 세계적인 기업이 탄생하지 않을까요?"(웃음)

복잡한 이론도 단순하게 정리해 내는 정주영의 성공DNA는 드러커와의 만남에서도 빛을 발했다. 피터 드러커의 말처럼 정주영은 타고난 기업가로 통한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아버지의 소 판 돈을 들고 가출을 감행했던 이 소년의 인생은 불확실성과 위험에 대응하는 기업가 정신의 표본으로 자리잡았다.

◆ 불굴의 기업가 정신

= 정주영의 인생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을 교과서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경험한 실패는 곧이어 나타날 성공의 주춧돌이 됐다. 그의 이 같은 경험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기업가 정신을 형성하는 자양분이 됐다.

정주영은 휴전 직후인 1953년 아무 기술과 경험 없이 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에 뛰어들었다. 장비, 기술 부족은 물론 홍수까지 겹쳐 몇 배의 공사비를 들여도 완공이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주위에서 모두 포기하라고 했지만 형제들 돈까지 모두 끌어들여 결국 공사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때 얻은 신용으로 정주영은 당시 전후 최대 공사라는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수주해 현대건설의 기반을 구축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65년 사상 첫 해외 사업이었던 태국 고속도로 건설에서도 그는 참담한 실패를 맛봤다. 현지의 엄청난 강우량과 악천후, 불리한 토질을 고려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언어와 풍습이 다른 현지 인력관리도 엄청난 문제를 야기했다. 그동안 국내 건설 사업에서 번 돈을 다 털어넣다시피 해 겨우 공사를 완료했다.

그러나 태국 고속도로 건설 경험은 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주역으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후 1972년 정주영은 울산 미포만 사진 한 장만 손에 든 채 그리스 거물 해운업자 리바노스를 만나 26만t짜리 배 2척을 주문받았고 조선소 건립과 동시에 2척의 배를 진수시킨 세계 조선사에 유일한 기록을 남겼다.

가난이 싫어 소 판 돈을 훔쳐 강원도 통천을 떠났던 소년 정주영이 60여 년 만인 1998년 소떼를 몰고 휴전선을 넘었다.
◆ 탁월한 창의성

= 정주영의 이 같은 성공 모델을 두고 `개발독재시대 모델`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그러나 현대그룹 발전의 길목에서 정주영이 내놓은 아이디어는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단순한 추진력과는 확연히 대비된다.

서산 간척사업은 정주영의 창의성을 보여주는 백미다. 농부의 아들 정주영은 1980년대 초 바다를 메워 옥토를 만드는 대규모 간척사업에 착수했다. 여의도 48배 면적의 바다를 메워 농토로 전환하는 프로젝트는 한국의 서해안 지도를 바꾸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서산 앞바다는 조수 간만의 차가 너무 커 20만t 이상의 돌을 구입해 매립해야만 물막이가 가능한 곳이었다. 이때 정주영은 폐유조선을 침하시켜 유속을 감속시키고 토사를 투하해 둑을 완성하는 `정주영 공법`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공사기간을 9개월로 단축하고 공사비도 280억원이나 절감했다.

유엔군 묘지를 보리밭 물결로 만든 일화도 유명하다. 1952년 12월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이 부산 유엔군 묘지를 방문한 뒤 "묘지를 푸른 잔디로 꾸며달라"고 요구했다. 12월에 잔디를 구할 길이 없었던 정주영은 "풀만 파랗게 나 있으면 되느냐"고 반문한 뒤, 보리밭에서 새파랗게 자라는 보리를 수십 트럭 옮겨 심어 묘지를 녹색바다로 만들었다. 이후 미군 공사는 현대건설의 독무대가 됐다는 후문이다.

숭실대에서 `정주영 창업론`을 강의하고 있는 정대용 벤처중소기업학과 교수는 "제한된 자원을 선택과 집중을 통해 적절히 배치하고 복잡한 문제를 직관을 통해 단순화할 수 있는 능력은 창의성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면서 "불확실성 아래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정주영의 창의적 능력은 21세기에도 적합한 것"이라고 말했다.

◆ 경영 민족주의

= "현대는 단순히 장사를 하는 단체가 아니라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분투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집단이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하는데 현대그룹의 과거 50년 동안의 성장은 우리 현대 자신을 위해서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경제를 일으키는 데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생각한다."

현대건설 창립 50주년이었던 1997년 정주영이 밝힌 경영관은 사업보국(事業報國), 식산흥업(殖産興業), 사회공헌(社會貢獻)의 정신과 맥이 닿아있다. 박태일 현대경제연구원 컨설팅본부장은 "정주영의 경영민족주의는 그 스스로 일개 경영자의 범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한국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정주영은 소비재보다 사회간접자본(SOC)과 중화학공업에 치중했다. 국가의 초석을 세우기 위해 서비스, 소비재보다는 국가의 기간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주영은 독자 기술 개발을 고집해 선진국에 대한 기술 종속성을 줄이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1967년 미국 포드사로부터 자동차 조립기지화 제안을 받았던 정주영은 이를 거절하고 포니와 같은 독자 모델을 개발해 수출했다. 현대중공업도 일본의 미쓰비시로부터 선박 건조를 5만t급 이하로 제한하는 조건으로 기술 이전 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세계 시장을 뛰어다니며 스스로의 힘으로 대형 선박을 건조하여 수출했다.

[박승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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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현대 창업주…산업화의 주역ㆍ남북관계 물꼬
SOC·중화학공업 육성 집중…국가 초석다져
소떼 몰고 訪北…첫 남북 정상회담 이끌어

◆ 경영의 神들에게 배우는 기업가 정신 / ② 정주영 현대 창업주 ◆

정주영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드물게 박정희,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 모두와 절친한 인물이었다. 정주영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상징하는 두 지도자와 협력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정주영의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사고에 기인한다는 평가를 듣는다. `정주영, 이봐 해봤어?`를 저술한 박정웅 메이택 대표는 "산업화ㆍ민주화 세력의 협력과 갈등 해소가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의 핵심 과제로 떠오르는 지금 정주영을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주영은 산업화의 주역이라기보다 산업화 그 자체다. 그의 인생이 곧 한국 산업화를 웅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주영이 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사업, 1970년대 중반 중동 건설사업에 뛰어들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의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했다.

박 전 대통령은 "정주영이가 하면 뭐든지 도와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였다고 한다. 해결하기 어려워 보이는 일이 있으면 정주영을 불러 "어떻게 하면 되겠소"라며 자문을 구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불굴의 기업가 정신을 지닌 정주영이었지만 그도 고향 생각만 하면 감수성의 세계에 빠져들곤 했다. 1915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분단의 아픔을 겪은 그는 고향의 가족 생각만 하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1998년 소떼를 몰고 방북해 2000년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에 물꼬를 텄던 그는 민족주의적 감수성이 남달랐다.

김대중 정부와 손잡고 대북경협 사업을 본격 추진했지만 그의 사후 대북송금 특검으로 흠집이 나기도 했다.

정주영은 자신의 생각을 이념의 틀 속에 가두지 않았다. 1982년 정주영을 찾아온 미8군 사령관 로버트 세네월드 장군은 "중국이 갑자기 서방과 물꼬를 트고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면 계층 간 양극화 등 사회 갈등 요소가 확대돼 앞날이 매우 불안하다"고 말했다. 이에 정주영은 "중국 사람 피 속에는 타고난 장사꾼 기질이 흐르고 있다. 잠시 혼란은 있겠지만 곧 안정될 것"이라고 말하며 중국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했다.

1990년 한ㆍ소련 수교를 한 달 앞두고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을 만난 정주영은 "시베리아 개발은 중동 개발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한국인들이 가장 잘할 수 있다"며 설득했다. 외교적 이해관계로 한ㆍ소 수교에 대한 신중론이 제기되던 시점이었지만 정주영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박정웅 대표는 "이제 시작하는 북한 개발을 추진할 수 있는 산업화 세력의 경험과 같은 민족으로서 북한을 생각하는 민주화 세력의 민족주의적 감수성을 두루 갖추고 있었던 정주영의 정신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협력 모델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박승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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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현대 창업주 어록
◆ 경영의 神들에게 배우는 기업가 정신 / ② 정주영 현대 창업주 ◆

▶나는 생명이 있는 한 실패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 있고 건강한 한, 나한테 시련은 있을지언정 실패는 없다. 낙관하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중

▶나를 세계 수준의 대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한국인이라고 남들은 평가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나 자신을 자본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아직도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며 노동을 해서 재화를 생산해 내는 사람일 뿐이다. -1982년, 미국 조지 워싱턴대학 명예경영학박사 학위 취득 기념 만찬회

▶최고경영자란 여러 능력을 가져야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어떤 과제가 있을 때 그것을 집중적으로 실행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같이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효율적으로 인식을 시키고, 그 인식시킨 내용이 효율적으로 행동에 옮겨지도록 하는 실행력이 있는 사람만이 최고 경영자요, 훌륭한 간부라고 생각한다. -1983.1.28, 현대그룹 간부 특강

▶나는 새벽 일찍 일어난다. 왜 일찍 일어나느냐 하면 그날 할 일이 즐거워서 기대와 흥분으로 마음이 설레기 때문이다. 또 밤에는 항상 숙면할 준비를 갖추고 잠자리에 든다. 날이 밝을 때 일을 즐겁고 힘차게 해치워야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행복감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을 아름답고 밝게, 희망적으로,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1983. 7, 신입사원 하계수련대회 특강

▶우리나라에는 주식을 사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 주식을 살 능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현대건설 주식의 50%를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에 내놓았다. -1984.4.26, 부산대학교 특강

▶어릴 적 가난이 싫어 소 판 돈을 갖고 무작정 상경한 적이 있다. 그후 나는 소를 성실과 부지런함의 상징으로 삼고 인생을 걸어 왔다. 이제 그 한 마리가 천 마리의 소가 되어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간다. 이번 방북이 단지 한 개인의 고향방문을 넘어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1998.6, 통일소와 함께 판문점을 통한 방북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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