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戰時에도 신사업에 전재산 투자 …`최초`즐긴 CEO 연암 구인회

즐거운 츄리닝 2010. 1. 18. 13:15

戰時에도 신사업에 전재산 투자 …`최초`즐긴 CEO
플라스틱ㆍ치약ㆍ라디오ㆍ전화기ㆍTV…도전정신으로 시장 개척
◆경영의 神들에게 배우는 기업가 정신 / ③ 구인회 LG 창업주◆

1962년 4월 구인회 LG 창업회장이 독일 푸어마이스터사와 차관계약을 체결한 후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1951년. 당시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 사장으로 훗날 LG의 창업자가 된 연암 구인회 회장은 자사의 `럭키 크림` 인기에 흐뭇해하면서도 골치 아픈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제품은 날개 돋힌 듯 팔리고 있었지만 용기 뚜껑이 자꾸 파손돼 반품이 잇달았던 것. 구 회장은 동생 태회와 일본에서 합성수지 책을 구해와 연구 끝에 플라스틱이 해결책임을 알아낸다. 하지만 당시 한국에 개념조차 생소했던 플라스틱 제품을 만들기 위해선 미국에서 플라스틱 사출 성형기를 들여와야 했다. 주변 사람들은 전쟁 중인데 무슨 투자냐며 구 회장을 말렸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일을 피하고 눈앞의 이익만 좇아서는 안 된다"며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업에 착수해 성공한다는 게 얼마나 보람찬 일인가"라고 주변을 설득했다. 그리고 20여 년간 사업을 통해 모아온 전 재산 3억원을 들여 사출기를 들여온다. 구 회장의 도전은 한국 최초로 플라스틱 제품을 생산하는 업적을 냈고 이는 기업의 성장동력뿐 아니라 한국의 화학산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됐다.

그로부터 58년이 흐른 2009년 말.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계열사 최고경영진과 신년 전략을 세우며 "경영환경의 어려움이 예상돼도 도전적인 목표를 세우고 근시안적인 목표를 세우는 형태를 경계하자"고 주문한다. 1969년 타계한 구인회 LG 창업회장의 경영신념이 60여 년이 흐른 후 손자인 구본무 회장에게 그대로 투영되고 있는 셈이다.

LG그룹을 창업한 구 회장의 이름 뒤에는 수많은 `최초`가 따라다닌다. △한국 최초 플라스틱 제품 생산 △한국 최초 치약 생산 △한국 최초 전자회사 설립 △한국 최초 라디오ㆍ선풍기ㆍ전화기ㆍTVㆍ세탁기ㆍ냉장고 생산 △한국 최초 합성세제 생산 △한국 최초 공개 채용 △한국 최초 외자합작기업 설립 △한국 최초 기업공개 등이 모두 그의 작품들이다.

`최초`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를 즐겨 기업을 성장시키는 기회로 삼았던 도전적 경영자가 바로 구인회 회장이다. 2000년대 인기를 끌었던 블루오션 경영을 이미 60여 년 전부터 실천하며 도전ㆍ모험을 즐기는 기업가정신으로 가득 찼던 사람이 그다. 경제 위기를 핑계로 투자와 신시장 개척을 주저하는 기업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대목이다.

◆ `손쉬운` 경영 사절

1967년 2월 열린 호남정유 여수공장 기공식에서 구인회 LG 창업회장(오른쪽에서 둘째)과 박정희 대통령이 발파 스위치를 누르고 있다.
= 1957년 구 회장이 이끄는 락희화학공업사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한국 최초로 플라스틱 제품을 쏟아낸 데 이어 1955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치약을 생산하며 독보적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락희화학공업사의 입지는 탄탄했고 해오던 사업만 계속해도 회사는 계속 잘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때 구 회장은 새로운 칼을 빼든다. 바로 전자산업이다. 여기저기에서 신사업에 대한 정보를 모으던 중 선진국 전자산업에 대한 얘기를 듣고 도전을 결정한 것이다. `화학산업만 해도 잘나가는데 왜 잘 모르는 사업에 뛰어드느냐`, `우리가 전자산업을 할 기술과 자본이 어디 있느냐` 등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구 회장은 "지금 머뭇거리면 앞으로 영원히 선두자리를 차지하기 힘들기 때문에 개척자 정신을 보여줄 때"라며 반대 목소리를 잠재우고 전자산업에 뛰어든다. 1년이 넘는 자료 수집 끝에 그는 한국 최초의 전자회사 금성사(현 LG전자)를 만든다. 이후 한국에서 처음으로 라디오ㆍ선풍기ㆍ전화기ㆍ냉장고ㆍTV 등을 줄줄이 만들어낸다. 이후 전자는 회사의 성장동력이 됐을 뿐 아니라 한국 전자산업을 일으키는 초석이 됐다.

◆ "한 번 믿으면 다 맡긴다"

= 구 회장이 도전ㆍ개척 정신으로 만들어낸 사업 분야는 얼마든지 더 있다. 1965년 전자ㆍ통신ㆍ화학 등에서 이미 큰 성공을 거뒀지만 그는 또다시 신성장동력을 찾아낸다. 다른 기업들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정유사업이 그것이다. 석탄 중심의 에너지 구조가 석유 위주로 전환하면 성장성이 클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2년 이상을 준비한 끝에 구인회 회장은 정부 허가를 얻어 국내 최초 민간 정유사인 호남석유(현 GS칼텍스)를 설립했다. 특히 호남석유는 한국 최초로 외국자본과 합작으로 만들어진 회사다.

남들이 생각지 못한 것을 시도하는 `최초`의 생각은 인재육성에서도 나타난다. 구 회장은 창업 초기부터 사람을 중시하며 `인화(人和)`를 강조했다. 또 `기업은 결국 사람이 경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재를 확보하지 못하면 미래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인재 확보를 위해 고민하던 1957년, 한국 기업 중 최초로 공개채용을 실시했다. 혈연ㆍ지연ㆍ학연에 따른 특채가 주류였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인화`와 사람을 중시하는 경영은 `한 번 믿으면 다 맡긴다`는 그의 철학에도 잘 나타난다. 이런 철학은 LG그룹에서 계열사 자율경영으로 유지되고 있다. 구 회장은 그룹의 주요 결정권을 계열사에 넘기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지면 사람은 최선을 다하도록 돼 있다. 모든 것을 믿고 맡겨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 연구개발(R&D)을 우선하는 경영

= 경영 측면에서도 구 회장은 `최초`와 `도전`을 즐겼다. 그는 `기업은 개인 소유`라는 인식이 있던 1969년 락희화학에 대해 8억원 규모 신주를 발행하며 국내 기업 첫 기업공개를 단행하기도 했다.

구 회장은 현장을 중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57년 공채로 대졸 신입사원을 뽑았을 때 주위의 만류를 떨쳐내고 현장에서부터 교육을 시켰다. `기업을 하는 데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이 현장`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구 회장은 R&D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R&D라는 개념이 생소하던 1950년대 공장을 세우기 전에 연구소부터 설립했다. R&D에서도 개척정신을 발휘했고 이는 다른 기업들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김규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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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빼닮은 장남 구자경
원칙과 뚝심, 파업으로 생산중단 때도`자율경영`지켜
현장 최우선, 공장ㆍ연구소ㆍ대리점 돌며 경영수업 받아

◆경영의 神들에게 배우는 기업가 정신 / ③ 구인회 LG 창업주◆



1988년 11월 상남 구자경 럭키금성 회장(현 LG그룹 명예회장)은 `21세기를 위한 경영구상`을 발표하면서 `자율경영`을 선포했다. 자율경영은 개별 사업과 관련된 모든 권한을 각사 사장에게 위임하고 회장은 그룹비전을 실천하는 측면지원 역할에 머무른다는 내용으로 LG그룹 경영의 밑바탕을 이루는 대원칙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불과 수개월 만에 노사 분규라는 암초를 만났다. 노조 대표단은 사장들이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회장 면담만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하지만 구 회장은 노조 대표들에게 "교섭에 대한 전권은 각사 사장에게 줬으니 대화를 해보세요"라고 응수했다. 노조원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2개월 넘게 연대파업으로 맞섰지만 그는 원칙을 지켰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LG그룹 성장을 이끌었던 구 회장 경영 방침은 `뚝심` `원칙` `현장 중시`로 요약된다. 이는 원칙을 지켜내지 못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오늘날 경영자들에게 시사하는 점이 크다. 1995년 장남 구본무 회장에게 그룹경영을 넘겨주고 지금은 명예회장으로 남아 있다.

구자경 회장은 또 `원칙`을 세우면 그것을 뚝심 있게 지켜서 경영 안정화를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구 회장은 현장을 최우선으로 여겼으며 이런 철학은 경영수업 과정에서 쌓였다. 그는 LG그룹 창업자인 연암 구인회 창업 회장 슬하 6남4녀 중 장남이다. 기업 경영을 이어받을 장남이었지만 화려한 외국 거래처보다 공장, 연구소, 대리점 등 밑바닥 현장생활을 오래했다. 진주사범대학 졸업 후 5년간 교직에 있던 그는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1950년 당시 락희화학공업사에 이사로 합류한다. 말이 좋아 `이사`지 당시 부산공장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고생스러운 현장 경험을 통해 고객과 신뢰에 대한 중요성을 깨달은 구 회장은 이를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와 `인간존중의 경영`으로 발전시켰다. 소비자가 아니라 고객이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도 그였다.

구 회장은 1970년 LG그룹 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25년간 LG그룹을 이끌면서 연평균 50% 이상 매출을 끌어올리는 탁월한 성과를 냈다. 이러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데는 `혁신`이 큰 힘이 됐다. 그는 외국 선진 기업의 혁신 현장을 발로 뛰어다녔고 이를 바탕으로 혁신을 이끌어냈다. 또 한국 기업 최초로 미국에 생산법인을 만들며 현지 생산의 중요성을 일깨웠고 1984년부터는 유전사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구 회장은 1987년 스스로 그룹 경영혁신팀장을 맡아 1년여 동안 연구한 끝에 이듬해 글로벌 초우량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혁신방안을 담은 `21세기를 향한 경영구상`을 탄생시켰다.

구 회장은 `한 사람의 뛰어난 머리보다 열 사람의 모아진 지혜가 중요하다`는 철학으로 합의 정신을 실천했다. 이는 LG그룹 최고경영진 전략수립 회의인 `컨센서스 미팅`으로 이어지고 있다.

[황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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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회ㆍ구자경 어록

◆경영의 神들에게 배우는 기업가 정신 / ③ 구인회 LG 창업주◆

"남이 미처 안 하는 것을 선택하라. 국민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것부터 착수하라. 일단 착수하면 과감히 밀고 나가라. 성공해도 거기에 머물지 말고 그보다 한 단계 높은 것에 도전하라." (구인회)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이나 다름없다." (구인회)



"제품이 잘 팔린다는 이유만으로 결코 값을 흐리지 말 것이며 일시적으로만 팔 생각을 말아라. 고객과의 꾸준한 관계만이 기업의 생명이다." (구인회)



"기업을 하는 데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이 바로 현장이다." (구인회)



"가치 있는 일에 대해서는 돈을 쓸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구인회)



"인화는 우리들을 스스로 풍요롭게 하고 안정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게 하며 우리 힘을 최대로 모아 보다 큰일을 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구자경 1982년)



"우리에게 연구개발심이 없다면 결국 스스로 발전을 포기하고, 나아가서 생존마저 팽개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구자경 1984년)



"기업 경영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불굴의 도전과 개척정신은 미래 지향적인 진취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구자경 1987년)



"나는 한 사람의 뛰어난 머리보다 열 사람의 지혜를 더 중시한다. 따라서 컨센서스는 이제 확고한 나의 믿음이다."

(구자경 2001년)



"나는 스스로를 `원칙주의자`라고 생각한다. 합작이나 제휴 등 수많은 경영 행위에서 일관된 판단의 잣대는 `원칙`이었다." (구자경 2001년)



"세계 최고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배우고, 거기에 우리 지식과 지혜를 결합해 철저히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구자경 2001년)



"인재(人材)와 인원(人員)은 구별되어야 한다. 흥하는 회사에는 인재가 많지만 쇠락하는 회사에는 인원만 많을 뿐이다."

(구자경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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